사회

알고보면 끔직한 서양 동화 (?)

jayjean 2009. 6. 29. 15:37
몇 년 전부터인가 디즈니 만화로 잘 알려진 서양의 동화들이 원본을 보면 매우 잔인하고 비교육적이라는 말이 나돌더라.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인터넷 어떤 커뮤니티에 한 사람이 올린 글에 누군가가
아주 단정적으로 그런 글을 올렸더군.
"백설 공주 이야기. 그거 원작을 보면 매우 변태적이고 끔직합니다.
근친 상간 이나 근친 살해, 시체 애호 등.."
대략 이런 비슷한 글이었던거 같은데.

아니, 이게 사실이라면 말도 안되는거 아닌가?
권선징악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잔인성이라면야
그 이야기들이 수집되고, 기록된 17세기 문화를 감안하면 이해 안될 것도 아니다.
신화나 구전 설화가 담고있는 metaphor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성적 코드가 암시되고 있다고 해도
해석의 문제이니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원작을 읽어보면 이라니..원작에 그런 '사실'들이 적혀있다면 과연 출판이 되었을까?
이 글을 쓴 사람은 원문을 읽어봤단 말인가?
결국 그림 형제의 독일 원문이나 그거의 영어 번역판을 찾아야 될 일이다.

찾아봤다.
http://www.pitt.edu/~dash/grimm053.html
원문과 함께 상세한 주석까지도 붙어있다.

Some differences between the edition of 1812 and later versions:

  • Beginning with the edition of 1819, the Grimms add the statement that Snow-White's mother died during childbirth, and that her father remarried. In the first edition, presumably the version closest to its oral sources, Snow-White's jealous antagonist is her own mother, not a stepmother.

  • Beginning with the edition of 1819, the poisoned apple is dislodged when a servant accidentally stumbles while carrying the coffin to the prince's castle. In the first edition the apple is dislodged when a servant, angry for having to carry Snow-White's coffin wherever the prince goes, strikes the sleeping princess.
뭐 결국 그림 형제의 동화가 1812년에 펴낸 초판과 1819년의 개정판이 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정도?

초판에는 구전 설화대로 못된 왕비는 백설공주의 친 어머니였는데, 개정판에선 좀더 이야기의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계모로 봐꿨다는 것.
그리고 독사과가 목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초판에서는 왕자가 가는 곳마다 백설공주의 관을 들고 따라오게 만들어 짜증이 난 하인이 몰래 백설공주를 두들겨 패서 였는데, 개정판에선 성으로 들고 가다가 일어나는 걸로 바뀐 정도다.

도무지 원문 어디에 근친 상간, 일곱 난장이와의 난잡한 성행위 같은게 나오는지?
자신있게 "원문을 보면" 이라고 한 사람은 어떤 원문을 본걸까?

슬슬 의문이 생긴다.

http://www.childbook.org/data/tale-10.htm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이름난 외국 동화 13편(그림형제 이야기 10편, 안델센 이야기 3편)을 골라 묶은 책입니다. 일본 여성작가 두 명이 시대는 12∼18세기로, 배경은 유럽의 어느 왕국으로 정해서 재창작한 이야기지요. 이 글에서는 1권 맨 앞에 실린 〈백설공주〉만 살펴봅니다. 다른 이야기도 크게 보면 〈백설공주〉의 문제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백설공주〉는 보는 눈에 따라서 여러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많이 이야기되는 것 세 가지만 소개합니다.

 이링 페처는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철학과현실사/이진우 옮김)에서 〈백설공주〉를 역사적 유물론과 희망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백설공주는 궁궐의 부귀영화가 백성들의 가난과 착취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일곱 언덕을 지나 살고 있는 용감한 반란군을 찾아갑니다. 그들과 힘을 합해 혁명정부를 세웁니다. 이런 해석은 역사학적 방법이라고 합니다.

 또 바바라 G. 워커는 《흑설공주 이야기》(뜨인돌/박혜란 옮김)에서 계모와 흑설공주의 연대를 꿈꿉니다. 헌터경은 왕이 되고 싶어서 흑설공주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때 계모가 난쟁이 나라의 일곱 난쟁이를 불러 흑설공주를 구해줍니다. 왕비에 초점을 맞추어 좋은 계모가 배다른 딸의 행복을 찾아주는 이런 이야기는 페미니즘의 눈으로 다시 읽은 것입니다.

 브루노 베텔하임은 정신분석학의 방법으로 〈백설공주〉를 어머니와 딸 사이의 오이디푸스 갈등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제 베텔하임의 분석을 꼼꼼히 살펴볼 것인데, 그 까닭은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뒤에는 《알고보면》)라는 책이 베텔하임과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얼마나 다른가를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한창 자라나는 딸한테 같은 여자로서 질투를 느끼는 어머니, 같은 여자로 어머니와 겨루며 어머니 대신 딸이 아버지하고 결혼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고, 모든 여자들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로 보던 딸은 여자로 몸이 자라나면서 어머니보다 자신이 더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백설공주〉에서 계모의 벽거울은 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거울이 하는 말은 진실입니다. 지나간 시대가 새로 올 시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만 그를 도와 더 새롭고 살기좋은 시대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자로 자라난 딸은 이제 부모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깊고 넓게 자라나기 위해 새로운 곳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집을 떠납니다. 백설공주도 집을 떠나는데 계모가 쫓아내는 것은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마음과 새로운 곳에 대한 불안을 뜻합니다.

....

 옛이야기는 민중의 문학이고, 승리의 문학입니다. 민중이라는 것이 꼭 프롤레타리아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옛이야기 속의 민중이란 계급으로 프로레탈리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어른한테 억눌리는 어린이들, 아무 힘도 없이 이 알 수 없는 무서운 세상에서 혼자 커 나가야 하는 어린이들, 부자한테 억눌리는 가난한 사람들, 남편한테 시달리는 아내,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버지, 젊은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똑똑한 사람들한테 억눌리는 바보들, 큰 나라에 종처럼 살아가는 힘없는 나라들, 이들이 주인공이고 이들이 끝내 승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지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힘이지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씩씩하게 한발한발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옛이야기입니다.

 그런에 이 책 속에는 그런 옛이야기의 정신, 목숨이 빠져 있고 허깨비만 돌아 다닙니다. 착한 백설공주도 아니고, 백설공주가 행복하게 잘 사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착한 주인공이 나오고 어찌어찌하면서 그들이 행복하게 잘 된다는 뻔한 끝내기가 중요한가 아닌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그것이 옛이야기의 목숨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권선징악, 이건 케케묵은 옛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문제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물을 것 없이 살마이 살아 가는데서는 언제어디서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살아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옛이야기 속에 가장 깊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한테도 살아갈수록 더욱더 깊이 다가오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헐...

일본 작가가 그 동안의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얕은 지식을 배경으로 "다시 쓰는 그림 동화"란 책을 냈다.
그 책은 당연히 기본적인 틀은 동화에서 따 왔지만, 내용은 상당히 일본식 하드 코어로 변형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자극적이라 꽤나 팔렸나보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걸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림 동화의 원전이 그것이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남들이 모르는 원전을 읽었다고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은근한 자신감까지 가지게 되었다.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래샴의 법칙은 동화에 대한 인식에도 적용되는가 보다.

PS.아..갑자기 "알고보면 엄청나게 에로틱" 하다고 천일야화도 갑자기 의심이 되네.
     이것도 원전을 찾아봐야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