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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해산 청구라...

jayjean 2013. 11. 5. 12:44

헌법에 반하는 정당에 대한 해산을 청구할 수 있는 법이라...

오늘 새누리당 정부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 청구를 심의했단다.

헌법재판소에서 180일 내로 9명중 6명이 찬성하면 정당 해산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통진당이 북한에 동정을 가지고있던, 북을 추종하던 알 바 없다.

다만, 남북한 모두에게 70년대 이전에 종결되었어야 할 과거 조선시대, 일제시대의 유산인 획일 주의, 권력 독점 등에 대해 보여온 태도는 한참 철지난 구시대적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이란 느낌이 많이든다.

반대편의 어버이 연합 등과도 크게 다르지않는 시대착오적인 또라이들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폭력적으로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민주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이 아닌가?

그걸 누가 옳고 그르다를 재단해서 판단한단 말인가?

자신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만, 우매한 국민들은 그럴 능력이 없으니 자신들이 판단해서 옳은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전형적인 꼰대논리다. 이것이야 말로 조선시대, 일제시대를 거친 후 명목상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고도 뿌리치지 못한 구시대의 잔재이다.

배타적/폭력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들을 저지하기 위한 방패로서 고안된 법이 도리어 그들의 손에서 칼날이 되는 현실이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했던가....

발췌

http://simjeon.kr/xe/index.php?mid=book&category=18045&listStyle=gallery&page=2&document_srl=30226

1933 년 7월 31일

    86. 독일에서의 나치의 승리

 

나 는 이탈리아를 언급한 이전의 편지에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 공황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가 사회 혁명이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생기는 것임을 지적했다. 유산 자본가 계급은 하층 중간 계급의 핵심 주변에 농민과 노동자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그들을 현혹시키는 반자본주의적 슬로건을 표방하는 대중 운동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권력을 탈취하고 국가의 지배권을 장악하면 그들은 민주주의적 제도를 폐기하고 그들의 적을 궤멸시키며, 특히 노동자들의 조직을 파괴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폭력에 기초한 것이다. 중간 계급 지지자들에게는 새국가에서 직장이 주어지며, 보통의 경우 산업에 대한 어느 정도의 국가 통제 조치가 취해진다.

전 후 몇 년 동안 불어닥친 독일의 대인플레이션은 독일의 산업가들과 대지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무거운 부채에 허덕이면서 소유지를 저당 잡히고 있던 대지주들은 거의 무가치한 인플레 통화로 그들의 부채를 생각하고 토지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대공장주는 공장 설비들을 개수하고 거대한 트러스트(기업 합동)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독일 제품은 어디서나 판로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내려 실업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노동자 계급은 강력한 노동조합을 조직하였으며, 마르크화가 붕괴하는 동안도 임금 인상을 성공시켰다.

그 러나 인플레이션은 중간 계급에 타격을 주어 그들을 비참한 빈곤 상태에 빠뜨렸다. 맨 처음 히틀러 밑에 모여든 사람은 1923--24 년에 영락한 중간계급이었다. 은행의 도산과 실업의 증대에 따른 불황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에 합류했다. 그는 불평 불만을 가진 자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그가 추종자를 모을 수 있었던 또 나의 사회 계층은 옛 군대의 장교들이었다. 이 군대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해체되어 수만의 장교가 일자리를 잃고 빈둥거리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 무렵 만들어지고 있던 각종 사설 군대인 나치의 '돌격대'나 카이저의 복위를 기도하는 보수주의자로 구성된 '독일 국가 인민당'의 '철모단'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도 대체 아돌프 히틀러란 어떤 자였는가? 놀랍게도 그는 권력을 잡기 1.2 년전까지는 독일의 시민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 중에는 보잘것 없는 계급의 군인으로 복무했다.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인 그는 독일 공화국에 대한 실패로 끝난 어떤 반란, 즉 소규모 반란에 참가한 탓에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관헌의 덕택으로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 이후 히틀러는 사회 민주당에 대항하여 국가 사회당이라는 정당을 조직했다. 나치라는 말은 이 명칭에서 유래했다. 즉 Nationale의 'Na'와 Sozialist에서 'Zi'를 취한 것이다. 이 정당은 '사회당'이라고 불리었지만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도 내력도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와는 적이었다.

나 치의 강령은 명료하고 적극적인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인 것으로서 독일과 독일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밖의 것은 가지각색의 증오를 끌어다 넣은 잡탕이었다. 독일의 굴욕을 표출시켰다는 베르사유조약에 반대함으로써 이것으로 많은 사람을 나치에 모아들였다. 그것은 반마르크스주의.반공산주의.반사회주의이며, 노동자의 노동 조합과 이와 유사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또한 유태인은 '아리안계' 독일 인종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그 질을 저하시키는 외래 인종이라 하여 반유태주의를 취했다. 또한 막연한 반자본주의로서 이것은 벼락 부자나 부유층에 대한 매도에 그쳤다.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사회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면 어떤 범위의 국가 통제 같은 정도였다.

독 일은 그리하여 서로 균형을 이룬 여러 세력의 무장된 각축장이 되었으며, 소요와 살인, 특히 나치에 의한 노동자의 살해가 그칠 줄 몰랐다. 때로는 노동자측의 보복도 있었다. 히틀러는 서로간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가지각색의 세력들의 돈줄을 잡는 데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하층 중간 계급과 대산업가들, 그리고 부농들의 이상스러운 연합이었던 것이다. 대산업가들은 히틀러가 사회주의를 혐오하고, 또한 기세를 올리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고 돈을 주었다. 중간 계급의 비교적 가난한 층과 농민,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들까지도 그의 반자본주의적 슬로건에 마음이 쏠렸다.

1933 년 1월 30일 나이 많은 대통령 힌덴부르크(그는 당시 86세였다)는 히틀러를 독일의 최고 집행 기관이며 수상에 해당되는 장관에 임명했다. 나치와 국민당 사이에 제휴가 성립되었으나 순식간에 나치가 완전히 지배권을 잡아 여타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명백해졌다. 총선 결과 나치는 여당인 국민당까지 합쳐 겨우 제국 의회 내의 다수를 획득했다. 더구나 그들이 그만큼의 다수를 획득치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치는 제국 의회 내의 반대파를 체포해서 모조리 형무소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 윽고 독일 전역에서는 나치, 또는 전투 부대로서 갈색의 셔츠를 제복으로 입은 '갈색 셔츠'의 테러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으로(나치가 다수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해산되고, 일체의 권력이 히틀러와 그 내각에 맡겨졌다. 그들은 법률을 만들 수도 있었고, 무슨 일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폐기되었으며, 민주주의의 모든 형태는 공공연히 유린당했다. 독일은 일종의 연방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폐지되고 모든 권력이 베를린에 집중되었다. 오직 상급 독재자에게만 책임을 지는 독재자들이 도처에 임명되었다. 히틀러가 최고의 독재자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 치가 정권을 잡은 이래 독일에서 행해져 온 갖가지 잔학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며, 야만적 구타, 고문, 발포, 살인 등이 대규모로 행해져 남녀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엄청난 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감옥과 집단 수용소로 보내져 지극히 나쁜 대우를 받았다. 특히 공산주의자에 대한 박해는 아주 지독했으며, 온건파 사회주의도 그보다 별로 나은 편이 아니었다. 유태인은 사냥개가 사냥감을 노리는 것과 같은 공격의 첫번째 목표가 되었으며, 그 밖의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노동 조합원.국제주의자 등이 피습 당했다. 나치는 이것을 칭하여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주의자, 아니 모든 '좌익'의 근절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유 태인은 또한 모든 지위와 직무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유태인 교수, 교사, 음악가, 법류가, 재판관, 의사, 간호사가 추방되었다. 유태인 상점 주인은 배척 당하고, 유태인 노동자는 공장에서 해고당했다. 나치에게 환영받지 못한 서적은 철저하게 소각되었으며, 관헌에 의해 분서가 행해졌다. 신문은 극히 경미한 견해의 차이나 비판 때문에 가차없는 탄압을 받았다. 테러 기사는 공표할 수조차 없었고, 조그마한 꼬투리만 잡혀도 엄중하게 처벌되었다.

나치 이외의 모든 조직과 정당은 금지되었다. 공산당이 맨 처음 제물이 되었고, 이어서 사회 민주당, 다시 가톨릭 중앙당, 나중에는 나치의 동맹자인 국민당까지도 모습을 감추었다. 수 세대에 걸친 노동자의 노동과 검약과 희생을 대표하는 강대한 독일 노동 조합은 해산되었고, 그들의 기금과 자산은 전부 몰수되었다. 단 하나의 정당과 단 하나뿐인 조직나치당만이 남게 된 것이다.

나 치의 이상한 철학은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억눌렀는데, 테러의 공포 때문에 아무도 항변하는 자가 없었다. 교육, 연극, 예술, 과학 등무엇이든 간에 나치의 낙인이 찍혔다. "진짜 독일인은 자신의 피를 가지고 사색한다!"고 히틀러의 주요한 막료 가운데 하나인 헤르만 괴링은 말했다. "순수 이성과 선입관이 없는 과학 시대는 지나갔다"고 나치의 또다른 지도자는 말했다. 아이들은 히틀러는 제2의 예수이며, 제1의 예수보다 훌륭하다고 교육받았다. 나치 정부는 민중. 특히 여성들 사이에 교육이 지나치게 보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 실 히틀러 추종자의 견해에 따르면 여성의 일터는 가정과 부엌이며, 여성의 주된 임무는 아이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하여 싸우고, 또한 죽도록 키우는 데 있었다. 나치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공중 계몽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일찍이 여성의 일터는 가정이다. 여성 고유의 사명은 그 여성의 조국과 국민에게 아동을 공급하는 데 있다. 여성의 해방은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 여성은 남성에 속하는 일은 남성에게 맡겨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괴벨스는 또한 그의 공중 계몽 방법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신문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 치 운동의 배후에는 잔학한 행위와 태러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 당원들이 모두 그런 자들뿐이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노동자의 대다수는 별개로 하고, 엄청나게 많은 수에 이르는 독일인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히틀러에 대해 지극히 진지하게 열광을 보냈다. 1932 년의 선거 결과를 보면 그는 전체 유권자의 52 퍼센트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 52 퍼센트가 나머지 48 퍼센트 내지 그 일부에게 테러의 위력을 휘둘렀다.

시 간이 지나면서 히틀러는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떨쳤을 것이다. 독일에 가본 사람들은 마치 종교적 부흥회와 같이 이상한 심리적인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독일인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하여 빚어진 오랫동안의 굴욕과 핍박의 시절이 과거의 것이 되고, 이제 다시 그들은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다고 느낀 것이 아닌가 싶다.

노 동자 계급은 갈색 테러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세계의 여론은 오히려 유태인에 대한 박해로 들끓었다. 유럽에서는 계급 투쟁이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동정의 방향은 계급의 분계선을 따라 갈라졌다. 그러나 유태인에 대한 공격은 하나의 인종 공격인데, 중세 혹은 제정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나 종종 비공식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일이었다. 한 인종 전체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는 유럽과 미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한 독일에 있는 유태인 중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 즉 아인슈타인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필두로 명망 있는 과학자, 의사, 변호사, 음악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어 충격은 더했다. 이들은 독일을 고국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가는 곳마다 독일인으로서 존경을 모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갖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것일 틀림없다. 그런데 나치는 광기에 찬 인종적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줄기찬 반대의 소리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드 디어 나치는 유태인 상점들과 전문 직업인들에 대한 배척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들 유태인의 망명을 허용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아사시켰다. 세계의 여론이 들끓는 것을 본 나치는 공식적인 유태인 배척 방법을 완화했으나, 그래도 그 정책은 계속되었다.

나 치의 승리와 그 결과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며,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에는 너도 틀림없이 동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파시즘이며, 히틀러 자신도 하나의 전형적인 파시스트이다. 그러나 나치 운동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비하면 훨씬 폭이 넓고 또한 한층 급진적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요소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단지 말살되고 말 것인가.

권 력을 장악한 뒤 히틀러가 먼저 노린 것은 독일 국내의 반대자를 분쇄하고, 나치당의 기초를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독일을 '나치화'하고 난 그는, 제2의 반자본주의 혁명을 기대하고 있던 나치 당 내의 좌파를 일소할 것을 결심했다. '갈색 셔츠'는 해체되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1934 년 6월 30일 총살되었다. 더욱이 다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거기에는 일찍이 수상을 역임한 바 있는 폰 슐라이헤르 장군도 끼여 있었다.

1934 년 8월에는 대통령 폰 힌덴부르크가 죽었고, 히틀러가 그 뒤를 이어 수상 겸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으며, 독일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민중은 심각한 궁핍에 허덕이게 되고, 이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거의 강제적으로 대규모적인 사적 구빈 기금 모금 사업이 조직되었다. 또한 집단 강제 노동이 시작되어 실업자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유태인은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으며, 독일인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독일의 경제 상태는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실업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비밀리에 재군비가 진행되어 독일의 공포는 커질 뿐이었다.

1935 년초 자르 분지의 국민 투표는 압도적으로 독일과의 합병 쪽으로 기울어져서 이 지역은 독일령으로 병합되었다. 같은 해 5월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축소 조항을 부인하고 강제 징병령을 발표하여 방대한 재군비 계획의 실마리를 풀었다. 프랑스를 위시한 국제 연맹의 여러 나라는 공포에 휩싸여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프 랑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을 시도했다. 영국 정부는 도리어 나치 독일과 제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1935 년 6월 그들과 해군협정을 맺었다. 결과는 더욱 우습게 되었다. 영국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교섭을 시작했고, 무솔리니는 이 호기를 잃을세라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 침략을 개시했다.

1938 년 3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 침입해서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했다. 또 한번 국제 연맹의 여러 나라는 굴복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공격적이고 야만적인 유태인 사냥이 나치에 의해 개시되었다.

이 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침략의 목표가 되어 수개월간 수데텐 독일인의 문제가 유럽을 흥분시켰다. 영국의 정책은 적지 않게 나치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감히 이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단행하지 못했다. 독일 측으로부터 즉시 전쟁의 위협에 놓이자 프랑스는 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영국도 이러한 배신에 동조했다.

1938 년 9월 29일 독일,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 사이의 뮌헨 협정에 의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수데텐 지방과 기타 넓은 지역이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며, 또한 이 기회를 틈타 폴란드와 헝가리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유럽의 분할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은 2등 국가의 대열로 떨어졌으며, 히틀러 지도하의 독일이 혼자서 우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2011-12-07

[유레카] 위헌정당 해산제도 / 박창식

나치의 집권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나치당이 민주공화정인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을, 그것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독일 입법자들은 그 뒤 민주주의를 원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정당을 더 이상 관용해선 안 된다면서 '방어 민주주의' 개념을 연구한다. 나치 패망 이후 독일 헌법에 위헌정당 해산제도를 도입한 연유다.

독일은 이 제도를 주로 극우 정당의 발호를 막는 데 적용했다. 1951년 서독 연방정부는 사회주의제국당을 나치당의 후계 정당으로,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도전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정부의 제소를 심사한 헌법재판소는 정당 해산을 결정했다. 정당의 위헌성이 확인되면서 그 정당 공천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지방의원들도 자리를 잃었다.

2001년 연방정부는 극우 신나치주의 정당인 독일민족민주당에 대해 다시 위헌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이 경우는 미묘한 절차 논쟁이 일어나면서 2003년 심판 정지가 선언됐다. 1956년에는 독일공산당이 헌재 결정으로 해산 처분을 당했다. 독일공산당은 나치즘의 부활과 무관했다. 이런 까닭에 독일공산당 해산 결정은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한나라당이 최구식 의원 비서의 선관위 누리집 공격 사건 때문에, 최악의 경우 정당해산 처분을 받을 수도 있게 됐다. 중앙선관위는 공격행위를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 행위'로 공식 규정했다. 우리 헌법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하는 정당은 헌법재판소 심사를 거쳐 해산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번 사건에 당 차원의 연루가 확인되느냐 여부에 따라 처분은 달라진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은 요즘 "자진 해산 뒤 재창당"을 주장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결과인지, 아니면 강제해산을 피해보려는 또다른 꼼수인지 모르겠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