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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말의 미국 동부 자동차 여행 코스를 잡는 계기가 된 글이 있다.
한국에서 나올떄 가지고 온 책인데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동일한 코스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capital hill
Statue of Liberty
케네스 데이비스 지음, 이순호 옮김.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책과 함께)
나오며
두 비행기가 세계무역 센터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조종사의 아리송한 말을 들으며 나는 달라스-포트워스 공항 활주로에 몸이 묶여 있었다. 그동안은 맨해튼 남단에 사는 내 가족들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활주로에 갇혀 있는 3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는 오직 "집에 가고 싶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얼마나 길고도 이상한 여행이었던지.
그 여조은 우연히 텍사스 교과서 창고건물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득히 먼 도시에서 홀로 헌혈을 한 다음 뉴욕행 열차표를 사기 위해 앰트랙 역사로 갔다. 하지만 며칠간의 표가 모두 매진된 것을 알고는 어디로 갈지 방향도 정하지 못하고 역사를 그냥 빠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딜레이 플라자를 지나 '수풀 우거진 둔덕'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캐네디 기념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죽은 대통령의 기념물에 손을 갖다 대며 나머지 미국과 뭔가 구체적인 연대감을 느껴보려고 했다.
달라스의 이곳은 내 생애 최초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그라운드 제로였다 . 다시 말해 한 시대의 시금석이 된 장소였다는 말이다. ' 그 사건이 터졌을 떄 나는 어디 있었더라?" 그때 나는 미국의 새로운 그라운드 제로와 내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은 또 다른 시대의 미국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기념관이 된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의 6층을 지나고 있었다.
비행기. 가차, 버스의 어느 교통편도 가능한 것이 없었기에 나는 자동차를 빌리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도로망을 살펴보기 위해 도로안내책을 보고 있으려니 텍사스와 뉴욕 사이에 놓인 많은 지명들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아직 내가 앞으로 가게 될 길이 피로 얼룩진 미국사의 1천 600 마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처음에는 직직거리는 라디오 방송으로 광란적인 상황을 계속 들으면서, 텍사스의 평평한 도로를ㄹ 가로질러 가는 것이 무척이나 평이하게 느껴졌다.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의 통행도 빠르게 이어졌다. 한떄는 그리도 정답던 하늘이 침묵에 빠져들때 마다 생겨나는 공백은 페덱스와 UPS 트럭이 메워주었다. 몇몇 트럭에는 손으로 간단히 만들어 붙인 '뉴욕행 물품' 표시가 붙어있었다.
나는 잠을 자기 위해 리틀록의 한 모텔에 처음으로 차를 세웠다.
굳이 마음속으에 그려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이미지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연방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함을 치고 침을 뱉는 성난 백인들 사이을 ㄹ지나 학교로 향하는 어린 흑인 학생들의 모습. 미국의 테러.
이튿날 아침, 나는 다시 기나긴 여정길에 올랐다.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멤피스를 가로 질렀다. 또 다시 살아나는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미국의 테러.
테네시를 지나치는 내 앞에 미국 도로 역사의 더 많은 부분을 알려주는 표지판, 네이선 베드포드 포레스트 주립공원(Nathan bedford forrest)이 나타났다. 연방군 흑인 병사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될 때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었던 포레스트는 후일 KKK단의 창설에도 일조를 했다. 미국의 테러.
몇 마일을 더 가자 샤일로 격전지라는 또 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 곳은 1862년 4월 이틀간 벌어진 전투에서 남부연합군 1만 3천명과 연방군 1만 1천명이 목숨을 잃은, 피로 얼룩진 곳이었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발밑에 시체가 밟히는 유혈 낭자한 전투였다. 당시 연방군과 남부 연합군 전사자는 독립전랭, 1812년의 미영 전쟁, 멕시코 전쟁의 전사자를 다 합친 숫자보다도 많았다. 그 학살의 목격자 중 한 명은 새계 무역센터가 붕괴된 뒤 사랑하는 이들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던 수많은 뉴요커들처럼 군인 남편을 찾아 나선 젋은 여인이었다. 전선의 간호사로 일할 것을 강요받은 이 여인은 의료 텐트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던 절단된 팔다리들의 끔직한 모습을 후일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미국의 테러.
내슈빌과 역사책에 나오는 올드 히코리, 즉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고향인 인근의 허미티지. 하지만 인디언들은 그를 예리한 칼이라 불렀고, 그는 수천 명의 인디언들을 그들 조상이 살던 고향에서 내쫓아 처절한 눈물의 행렬로 내몬 인디언 제거 정책의 장본인이었다. 미국의 테러.
녹스빌이 다가오자 오크리지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의 숙소로 만들어진 마을 치고는 무척이나 목가적인 이름이었다. 그것을 보자 검게 그을린 히로시마와 세계 무역센터의 어지럽게 뒤엉킨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미국의 테러.
평지에서 컴버랜드의 언덕으로 힘겹게 올라가 다시 버지니아로 들어서니, 셰난도어 계곡과 남북전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더 많은 유적지가 나타났다. 윈체스터로 나아가는 출구가 이 곳에 있었다. 길고도 치열했던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국인끼리 싸우며 70번 이상이나 주인을 갈아치운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그러고 나서 이제 형제들의 싸움으로 생겨난 웨스트 버지니아로 들어서니 하퍼스 페리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은 광적인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자살 공격을 감행하여 화약통에 불을 질렀던 곳이다. 그런 그를 누구는 테러리스트라 불렀고, 누구는 순교자라 불렀다.
메이슨 딕슨 라인(펜실베이니어의 영주 펜과 메일랜드의 영주 볼티모어와의 식민지 경계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인 측량사 C 제이슨과 J 딕슨이 1763~1767년에 설정한 선)을 넘어 메릴랜드의 헤거스 타운과 샤프스버그로 들어서면, 하루 동안에 치른 것으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앤티탐 격전지를 볼 수 있다. 미국의 테러.
이제 지형은 펜실베이니어로 바뀌었다. 이 곳, 한때 굶주린 로버트. E. 리의 남부 연합군 병사들을 잡아끌었던 그 풍요로운 들판이 9월의 태양 아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옥수수 밭은 샛노란 호박색이라고는 할수 없어도 풍요로운 수확을 약속해 주는 황금 물결로 일렁거렸다. 게티스버그를 지나려니 1867년 7월의 사흘 동안 일어난 유혈 참극이 머리에 떠올랐다. 미국의 테러.
한떄 겁에 질린 미국인들이 로버트 리장군의 접근을 피해 도망친 해리스 버그를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트니 뉴욕이 점점 가까워졌다. 우애의 도시로 불리는 미국의 본향 필라델피아 시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그들은 미국의 애국자였을까? 하지만 의회파들에게 그들은 반역적인 테러리스트였다.
도로위에서 40시간 이상을 보낸 뒤 마침내 조지 워싱턴 다리에 이르자 대통령이 교회에 있었다. 보아하닌 그곳에서는 속죄보다는 복수와 테러 종식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가는 듯했다. 그 순간 미국은 어둠을 조금 밖에 밝히지 못하는 손전등을 들고 아주 길고도 어두운 터널의 입구에 서 있는 듯했다.
진주만 공습,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죽음, 존 F 케네디의 암살,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이 미국인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듯 민간 여객기 4대의 공중 납치와 그에 뒤이은 죽음과 파괴 역시 미국인들 삶을 바꿔놓았다, 누구도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장소를 잊지 못할 것이다.
미국을 테러와의 전쟁응로 몰아간 그 공격은 효율의 극대화를 이룬 것에 비하면 방법은 너무도 간단했다.
19명의 납치범들-아메리칸 에어라인 11기와 77기,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175기에 각각 5명,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기에 4명-은 승객 하중은 작지만 대륙간 횡단 비행을 할 만큼 연료 용량이 큰 여객기를 고른 것이다.
미국에 대한 테러리스트 공격과 아프카니스탄 및 그 외 다른 지역의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그 공격에 대한 사실의 많은 부분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폭로되지 않았다.시간이 가면서 그 사실에 대한 인식 또한 바뀔 것이다. 911 사태가 일어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이만큼 밝혀지지 않았는가. 테러공격의 사망자 수가 6천명이 넘는다는 첫 보도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일어난지 몇 달 후 최종 집계된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3천 47명이었다. 이 비극은 1812녀녀 미영 전쟁 이래 최초로 해외의 적이 미국 본토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테러 공격 직후 미국 정부는 곧 아프카니스탄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 휘하의 알 카에다 테러 집단에 사건의 초점을 맞추었다.2001년 10월 7일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연합군이 알 카에다와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고 있던 아프카니스탄의 탈리반 정권에 대한 보복 공격을 시작했다.
그 공격이 있은 지 몇 달 후 FBI는 요원 몇명이 미국비행교습학교에 아랍학생들이 입학할 가능성과 미국 내 테러리스트 공격 가능성을 언급한 메모를 테러 공격이 있기 전에 작성한 사실을 인정했다. 미국 정보 기관이 무었을 알고 있었고, 알았다면 그것이 언제였는 지는 결코 완전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9.11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사건이 일어난 처음 몇 주 몇 달 동안, 미국 전역에는 지원과 애국의 물결이 넘쳐 흘렀다. 공격으로 죽어간 사람들, 특히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다 죽어간 사람들의 영웅적 행위는 미국 정신의 진수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것은 모든 시대에는 필요한 만큼의 영우이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얼마나 진정으로 바뀌었을까? 의회는 여전히 알수 없는 의안을 놓고 싸우고 있다.아이들의 실종도 여전하다. 주식시장의 곤두박질 또한 나라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도 같다. 역사가들은 어쩌면 2002년 말의 미국을 신뢰감에 금이 간 시대로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기간에 미국은 FBI와 CIA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했다. 교회, 특히 카톨릭 교회는 일부 사제들이 저지른 성추행이 폭로되어 권위가 땅에 떨어쪘다. 몇 개만 꼽아도 엔론, 타이코, 글로벌 크로싱, 월드콤 같은 굵직한 기업들의 도산과 부정이 드러나면서 국가 재정 안전도에 대한 미국의 신뢰감은 산산히 부서졌다.
역사는 종종 장차 일어날 일을 몇 발짝 앞서 보여줄 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나는 것은 어디일까? 911은 단지 미국사라는 피로 얼룩진 도로 안내 표지판 속의 또 하나의 도로 표식으로 남을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배운 바로는, 때론 대답보다는 질문이 월씬 쉽다.
2002년 12월
뉴욕에서
케네스 데이비스
6 page에 달하는 내용을 책을 보며 키보드로 옮겨치고나니 손가락이 다 아프네...
설마 이거 일부분 올렸다고 저작권 위반은 아니겠지...